제2편 헛됨
결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결함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더 큰 불행이다. 왜냐하면 의식적인 환각이라는 불행을 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를 속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받기에 합당한 것 이상으로 평가받기를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을 속이고 또 우리가 받기에 합당한 것 이상으로 평가받고 싶어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이렇듯 우리가 실제로 지니고 있는 불완전과 부덕만을 그들이 지적할 때 결코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원인이 그들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를 이롭게 하고 있다. 이 불완전을 모르는 불행에서 우리를 건져주는 데 기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우리의 결함을 알고 또 우리를 경멸한다고 해서 우리는 화를 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인식하고 또 우리가 경멸받을 만할 때 우리를 경멸하는 것은 정당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공정성과 정의로 가득한 마음에서 응당 태어날 감정이다. 그렇다면 전혀 반대되는 경향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발견할 때 우리는 뭐라 말할 것인가. 왜냐하면 우리가 진실과,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혐오하고, 우리에게 유리하게 그들이 기만당하기를 바라고, 또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우리보다 더 높이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말이다.
여기 나름 소름 끼치게 하는 예가 하나 있다. 가톨릭교는 자신의 죄를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고백하라고 명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숨겨도 좋다고 인정한다.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는데, 이 사람에게는 마음속까지 열고 사실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보이라고 명한다. 가톨릭교가 진실을 밝히라고 우리에게 명하는 것은 오직 이 한 사람에 대해서뿐이며, 한편 이 사람은 범할 수 없는 비밀을 지키도록 의무지워짐으로써 이 진실은 그의 안에 있으면서 마치 없는 것같이 되게 한다. 이보다 더 자비롭고 부드러운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인간은 너무나도 타락하여 이 계율을 가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럽의 많은 국가들로 하여금 교회에 반항하게 한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이다. 모든 사람들에 대해 행하는 것이 마땅한 것을-왜냐하면 사람을 속이는 것이 옳다는 말인가-단 한 사람에게만 하라고 명하는 것조차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마음이란 이 얼마나 불의하고 부조리한가!
진실에 대한 혐오에는 갖가지 정도가 있다. 그러나 이 혐오가 누구에겐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은 확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애심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을 책망해야만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갖가지 우회적이고 부드러운 표현을 택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그릇된 조심성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의 결함을 축소시켜야 하고 이것을 변명하는 척해야 하며 칭찬과 함께 사랑과 존경의 표시를 섞어야 한다. 이 모든 것으로도 이 약이 자애심에 쓰디쓴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 자애심은 가능한 한 그 최소량을 취하되 항상 불쾌감을 가지며 또 왕왕 이 약을 제공하는 사람들에 대해 남모를 원한을 품는다.
사람들이 우리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이익을 얻게 될 때 우리에게 불쾌감을 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서 멀어지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다. 그들은 우리가 바라는대로 우리를 대해 준다. 진실을 혐오하기에 진실을 덮어주고 아첨받기를 바라기에 아첨하며 속임당하기를 바라기에 속인다.
출세의 길을 여는 행운의 각 단계마다 우리를 진실에서 더욱더 멀어지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랑을 받으면 유리해지고 반감을 사면 불리해지는 그런 인물들의 비위를 거스리는 것을 더욱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떤 왕이 전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고도 자기만은 이것을 모를 수도 있다.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듣는 사람에게는 유익하지만 말하는 사람에게는 해롭다, 미움을 사기 때문에. 그런데 왕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섬기는 왕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더 소중히 여긴다. 따라서 자기를 해치면서까지 왕의 이익을 도모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이런 불행은 분명히 신분이 높을수록 더 크고 더 일반적이다. 그러나 신분이 낮다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데에는 항상 이익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의 삶은 영원한 환각일 뿐이다. 서로를 속이고 피차 아첨하기만 한다. 우리에 대해 우리의 면전에서 마치 우리가 없을 때처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 사이의 결합이란 오직 이 상호 기만 위에 서 있을 뿐이다. 만약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친구가 자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설사 그가 진실되게 사사로운 감정 없이 말하였다 해도 존속할 우정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자신 안에서나 타인에게나 위장하고 기만이고 위선일 뿐이다. 그는 타인이 자기에게 진실을 말해 주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타인에게 진실을 말하기를 피한다. 정의와 이치에서 이토록 동떨어진 이 모든 성향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천성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다.
100-(275) 인간은 종종 상상을 심정을 착각한다. 그리고 회심할 생각을 하자마자 벌써 회심했다고 믿는다.